2개의 핸드폰 + 지리산
2개의 핸드폰
구름바다
지리산 치발목 산장 마당에서 바라본 풍경.
고목 사이로 지리산의 능선이 넘실거리고
멀리에는 구름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다.
<1997년 6월, 치발목 산장>
내게는 핸드폰 두 대가 있다.
한 대는 내 것이고 다른 하나는
하늘나라에 계신 시어머님 것이다.
내가 시부모님께 핸드폰을 사드린 건 2년 전.
두 분의 결혼기념일에 커플 핸드폰을 사드렸다.
문자기능을 알려 드리자
두 분은 며칠 동안 끙끙대시더니
서로 문자도 나누시게 되었다.
자연이 그려낸 수묵화
비가 그친 뒤 지리산에 펼쳐진 겹겹의 능선과
그 사이로 피어오르는 절묘한 구름의 조화가
마치 자연이 그려낸 한 편의 수묵화 같다.
<1996년 8월, 성삼재>
그러던 올 3월 시어머님이
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셔서
유품 가운데 핸드폰을 내가 보관하게 되었다.
새털구름 사이로
바래봉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풍경.
진분홍빛 화사함 뽐내는 철쭉, 지리산의 주 능선,
겹겹 물결을 이룬 새털구름이 멋지게 한 화면에 담겼다.
<1995년 5월, 바래봉>
그러고 한 달 정도 지날 무렵.
아버님이 아파트 경비일을 보시러 나간 후
'띵동'하고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.
어머님 것이었다.
7월의 지리산 - 천상화원
저녁에 살짝 피었다가 이른 아침이면 수줍게 꽃이 지는 원추리 꽃.
멀리 보이는 구름과의 조화가 절묘하다.
7월말이면 노고단에는 원추리 꽃을 비롯한 다양한 야생화가 피어
그야말로 천상화원을 이룬다.
<1995년 7월, 노고단>
"여보, 오늘 야간조니까
저녁 어멈이랑 맛있게 드시구려."
순간 난 너무 놀랐다.
혹시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
치매증상이 오신 게 아닌가 하는
불길함이 몰려왔다.
지리산 써리봉에서
지리산 써리봉에서 바라본 6월의 신록.
하늘에는 순백의 구름바다가 펼쳐져 있다.
<1997년 6월, 써리봉>
그날 밤 또 문자가 날아왔다.
"여보, 날 추운데 이불 덮고 잘 자구려.
사랑하오."
남편과 나는 그 문자를 보며 눈물을 흘렸고
남편은 좀 더 지켜보자고 했다.
지리산의 여름
제석봉에서 반야봉을 바라다본 지리산 여름의 모습.
푸른 신록과 세월의 연륜을 간직한 고목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.
<1993년 7월, 제석봉>
아버님은 그 후
"김 여사!
비 오는데 우산 가지고 마중가려는데....
몇 시에 갈까요?
아니지.
내가 미친 것 같소.
보고 싶네" 라는 문자를 끝으로
한동안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셨다.
가을이 그려 놓은 수채화
가을을 맞은 천왕봉은 고운 단풍의 물결로
한편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.
<1993년 10월, 천왕봉>
그 얼마 후 내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.
"어미야, 오늘 월급날인데 필요한 거 있니?
있으면 문자 보내거라."
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
"네. 아버님.
동태 2마리만 사오세요"
하고 답장을 보냈다.
노고단의 아침
초가을의 지리산.
노고단의 아침 이슬을 잔득 머금고 피어있는 쑥부쟁이들이
지리산의 아침을 연다.
<1995년 9월, 노고단>
그날 저녁 우리 식구는
아버님이 사오신 동태로 매운탕을 끊인 후
소주 한 잔과 함께
아버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.
저 멀리 보이는 섬진강
눈이 수북하게 내린 지리산.
맑고 청명하던 하늘에 갑작스레 먹구름이 몰려온다.
구름 사이사이로 햇빛이 살며시 비추고
저 멀리 어렴풋하게 섬진강이 보인다.
<1997년 2월, 노고단>
"아직도 네 시어미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.
그냥 네 어머니랑 했던 대로 문자를 보낸거란다.
답장이 안 오더라.
그제야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알았다.
모두들 내가 이상해진 것 같아
내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던 것도 안다.
미안하다."
노고단, 순백의 향연
지리산에 내린 눈은
온 세상을 순백의 눈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.
<1995년 2월. 노고단>
그날 이후 아버님은 다시 어머님 핸드폰으로
문자를 보내지 않으신다.
하지만 요즘은 내게 문자를 보내신다.
노고단에서 바라본 지리산
노고단에서 바라본 구례벌의 왕시루봉과
멀리 보이는 섬진강의 조화가 절묘하다.
<1993년 9월, 노고단>
지금 나도 아버님께 문자를 보낸다.
"아버님. 빨래하려고 하는데
아버님 속옷은 어디다 숨겨 두셨어요?"
사진 / 14년간 지리산 찍은 산악 사진가 이한구
음악 / 조미미 / 먼 데서 오신 손님